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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
우정, 그러나 국가
나비야 칸
에세이
... 뉴델리 인도

2020년 8월에 우리는 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뉴델리에 있는 선더 너서리 (Sunder Nursery) 공원에 갔다. 늦은 축하 자리였다. 코로나로 도시는 움츠려 들어 있었다. 공원은 열려 있었지만 뒤숭숭했다. 하늘은 창백하고 지나치게 맑았다.

그는 우리에 공원 전체를 걷게 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어쩌면 세 번. 나는 불평했다. 다리가 아프다고. 그는 내 말을 무시하고 계속 걸어가며 몇 분마다 한 번씩 뒤돌아 보며 우리가 여전히 있는지 확인했다. 그는 계속 움직이고 싶어했다. 그때 나는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 무렵, 방송국은 그를 이미 유죄로 단정 짓고 있었다. 그는 델리(Delhi) 폭동의 공모자 중 한 명으로 지목되고 있었다. 몇 달 동안 그의 얼굴은 “주모자” 그리고 “테러”와 같은 단어와 나란히 등장했다. 우리는 모두 체포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문제는 언제냐는 것이었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은 고통스러웠다. 전국 봉쇄의 여파로 저녁의 델리는 평소보다 더 조용했다. 그는 슬퍼보였다. 두려워 보이지는 않았다. 무너진 것 같지도 않았다. 그의 정확한 말은 생각나지 않지만, 그가 시간을 길게 늘리고 있다는 느낌만큼은 기억한다.

나는 2016년 4월 델리의 한 시위 현장에서 처음으로 우마르 칼리드(Umar Khalid)를 만났다. 그는 그날 마지막으로 발언했다. 나는 기억한다. 그가 박수받기 위해 말하는 사람처럼 발언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그는 이미 무엇을 잃을 각오가 된 사람처럼 발언했다.

사람들은 그를 학생 지도자, 운동가, 인도의 다수파 정치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자로 안다. 그가 사석에서 얼마나 세심한 사람인지를 그들은 모른다. 그는 안다. 누가 누구와 소원한지, 누가 아픈지. 그는 몇 시간이고 전략을 두고 논쟁하고서, 한밤중에 당신에게 밈을 보낼 줄 아는 사람이다. 우리의 우정은 인간의 선함이라는 공통된 신념뿐만 아니라 의견 차이에서 피어났다. 우리는 정치에 대해, 전술에 대해, 어조에 대해, 제도를 얼마나 신뢰할 것인지에 대해 서로 다르게 생각한다. 우리는 논쟁하지만 결코 돌아서지 않는다.

2020년 9월, 경찰은 그를 조사하기 위해 소환했다. 그때까지 이미 같은 사건으로 많은 이들이 체포된 상태였다. 우리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고 있었다. 소환장은 단순한 소환장이 아니었다.

그는 반테러 법안에 의해 재판도 없이 5년 반 넘게 수감되어 있다. 인도 밖의 독자를 위해 설명하자면, 그 말인즉슨 법원이 유죄를 판결하기도 전에 장기 구금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보석은 거의 불가능하다. 시간은 해결 없이 늘어진다.

델리에 있을 때 나는 감옥에 있는 그를 방문한다. 감옥은 영화가 교도소를 상상하듯 그리 극적이지는 않다. 형광등이 잔뜩 켜져 있고 절차대로 흘러간다. 벽의 페인트는 낡은 노란색으로 바래 있다. 먼지가 모든 것의 틈새에 내려앉는다. 당신은 철문 하나를 지나고, 또 하나를 지난다. 각 철문은 경비원이 지키고 있는데, 그는 당신의 얼굴은 거의 쳐다도 보지 않지만 당신의 신분증만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외부 대기실은 열기를 가두는 양철 지붕이 얹어진 좁은 콘크리트 공간이다. 여성들은 법원 서류 사본과 자필 신청서로 가득 채워진 투명한 플라스틱 파일을 들고 줄을 서 있다. 파일은 너무 많이 열고 닫아 구겨져 있다. 노인들은 마치 수년을 이렇게 서 있던 것처럼 금속 바리케이트에 기대어 있다. 당신은 계급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해진 샌들. 색바랜 두파타. 집에서 다시 채워 온 값싼 플라스틱 물병. 당신은 종교도 볼 수 있다. 타키야. 히잡을 쓴 여자들. 이 시스템이 누구에게 가장 익숙한지를 말해주는 이름들이 호명된다. 아이들도 기다린다. 그들은 거기 있어선 안 됐다. 그들은 바닥에 앉아 다리를 흔들며, 교도소라는 철자를 외기도 전에 교도소의 안무를 암기한다. 내부는 땀 냄새, 축축한 종이 냄새 그리고 금속 냄새 같은 것이 난다. 여름에 열기는 단지 어깨에 머물지 않고 두피, 등, 무릎 뒤를 짓누른다. 콘크리트는 열기를 위로 뿜어 올린다. 나는 몇 분이면 끝날 미팅을 위해 당신은 두세 시간을 서 있다. 이 장소의 어떤 것도 당신에게 비극에 관해 말해주지 않는다. 그저 기계처럼 작동할 뿐이다. 그것이 폭력이다. 그것은 관료제가 그러하듯 평범하다. 무관심하기에 효율적이다.

이것을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재배열된다는 걸 나는 안다. 대기줄은 하나의 이미지가 된다. 감옥은 몸을 틀로 조직하고 나는 그 틀을 문장으로 번역한다. 여기에는 불편함이 있다. 나는 중립적인 관찰자가 아니다. 나는 수감 중인 친구가 있는 사람이다. 줄 지어 있는 사람들의 안무, 한 방향으로 서있는 방문객의 모습, 경비원이 약간 높은 위치에 서 있는 모습을 지켜볼 때면 나는 해석하고자 하는 충동을 느낀다. 하지만 해석은 모서리를 매끄럽게 만들 수 있다. 글쓰기는 무언가를 거리 두는 방식으로 읽기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 나는 이것을 단순한 소재로 바꿔놓고 싶지 않다.

처음 안에 들어갔을 때, 나는 내가 분명 쓰러지리라 확신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몸은 적응한다. 당신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 건너편에 서있다. 경비원은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있고 당신은 본능적으로 목소리를 낮춘다. 당신은 의도치 않게 초를 세게 된다. 그러다 몇 분이 지나면 낯섦은 옅어진다. 우리는 그가 읽고 있는 책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를 짜증나게 하는 친구에 관해서. 가족과의 황당한 다툼에 관해서. 우리 부모님들의 건강에 관해서. 우리는 웃기도 한다. 때론 너무 크게. 마치 이 방이 국가에게 속하지 않은 것처럼.

우리는 서로에게 편지를 쓴다. 어린 시절 이야기를 쓴다. 가끔은 정치 이론을 쓰지만 바보 같은 것들도 쓴다. 우리는 스스로를 검열하지 않는다. 만약 국가가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다면, 모든 것을 듣게 하리라. 우리는 두려움이 우리 우정의 결을 결정하기를 거부한다.

내가 그를 알게 된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는 감옥에 있었다. 그 사실은 기억을 재배열한다. 그에 대한 나의 관념은 공원에서 지나치게 빨리 걷던 몸과 감옥 면회실 유리벽 너머에 서있는 몸으로 나뉜다. 우정은 약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의도적이게 되었다. 당신은 대화가 통제될 때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

죄책감이 있다. 내가 박사학위를 위해 미국으로 떠났을 때, 공항에서 목구멍으로 죄책감을 느꼈다. 나는 비행기에 탑승하고 있었다. 그는 재판 날짜를 세고 있었다. 세미나실에서 나는 국가 폭력, 수감, 억압에 대해 읽는다.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 답글을 쓴다. 그러다 수감동 안에 있는 그를 생각하면, 언어는 장식처럼 느껴진다. 어떤 날에는 노트를 찢고 싶다. 어떤 날에는 내가 무엇을 쓰든, 무엇을 하든 그를 감옥에서 꺼낼 수 없기 때문에 그 어느 것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교도소는 현장 연구(fieldwork)를 생각하는 방식을 흔들어 놓았다. 나는 현장 연구란 현장에 들어가고 나오는 일이라고 믿곤 했다. 연구와 삶 사이에 경계가 있다고 말이다. 감옥 밖에서 줄을 섰던 경험은 그 허구를 복잡하게 만든다. 나는 친구로서 그곳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훗날 이 기다림에 대해 글을 쓰려는 사람으로서 서 있는 것일까? 나는 나도 모르게 세부적인 것들에 주목한다. 열쇠 소리. 호명되는 이름들의 패턴. 거듭 미뤄지는 기일들. 그러한 주목이 나를 불편하게 한다. 우정은 현존을 요구하지만, 인류학은 관찰을 훈련시킨다. 이 둘은 내 안에서 쉽게 공존하지 않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정은 노동이다. 붐비는 법정에 앉아, 판사가 그의 사건 번호를 호명할 때까지 기다리고, 그 사건이 다음 달, 다른 날짜로 연기되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다. 몇 천 페이지에 이르는 사건 기록부를, 사소한 편집만 가해진 반복되는 동일한 문단들을, “음모”나 “불법”과 같은 동일한 구절들을 읽는 일이다. 등줄기로 땀이 흐르는 섭씨 40도의 더위 속에서 줄을 서는 일이다. 그에게 십오 분 동안 어떤 이야기를 할지 머릿속으로 리허설하는 일이다. 마침내 변함없이 활짝 웃는 그를 마주했을 때, 밖에서의 몇 시간들이 아무 상관이 없어진다는 것을 아는 일이다.

국가는 본보기를 원한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보고 그를 따라 행동을 고치기를 바란다. 국가는 관계를 취약하게 만들려 한다. 국가는 사람들이 지쳐가는 것을 기대한다. 나는 가끔 지친다. 그 때문이 아니다. 시스템 때문이다. 끝없는 미뤄짐 때문에. 뉴스 매체가 나아가는 방식 때문에. 하지만 이 우정에 지치지는 않는다.

이제야 선더 너서리에서의 그날을 되돌아보면서 그 걷기를 다르게 이해하게 된다. 그는 오후를 길게 늘리고 있었다. 그것이 곧 끝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집으로 돌아가던 드라이브를 생각한다. 얼마나 평범했던지. 평범한 일들이 얼마나 빠르게 기억이 되어버리는지.

매 면회는 우리를 조금씩 재배열한다. 나는 철문을 통과해 나가고, 그는 다시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 출구는 나를 움직이게 하고 그를 가둔다. 나는 이야기들을 강의실과 여러 대화 속에 가져온다. 그에게 시간은 법원 기일로 측정된다. 우리가 서로를 아낀다는 이유만으로는 사라지지 않는 비대칭이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대화할 때, 몇 분 동안 국가는 물러난다. 국가가 사라지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문장의 톤을 국가가 좌우하게 두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는 한 사람의 몸을 구속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공간을 점유하지는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