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 EN
2026.10
어떤 헌책은 누군가의 죽음 이후에 남겨 진다
호재
필드노트
... 한국

어느 날 예기치 않게 전화가 한 통 걸려온다. 요지는 늘 같다. 집에 책이 많은데 정리하고 싶다는 연락. 금전이 오가는 거래를 위한 건조한 통화여야겠지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상대방의 음성에는 어려운 부탁을 하는 사람 특유의 송구함이 느껴진다. 또는 오랜 시간 묵혀왔던 일을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된 뒤에야 처리 하는데서 오는 중압감 같은 것이 묻어있다.

그러한 인상의 전화를 받고 난 후에 약속 날짜가 되어 헌책을 구입하기 위해 방문하게 되었을 때 면 방 한 칸을 가득 채운 책들의 주인이 직접 나를 맞이하는 경우는 드물다. 전화를 건 사람은 대개 자녀이거나 배우자, 혹은 그 밖의 유족이다. 그 사실을 알아차리는 데는 대문을 열고 들어선 뒤 일 초도 걸리지 않는다. 책 앞에 서있는 난감한 표정의 가족들의 모습에는 책에 대한 기시감 같은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마치 고인이 왜 그렇게까지 책을 읽어왔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치로 이 상황마저도 어렵게 생각하고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헌책방 운영자는 책등에 쓰여 있는 제목들을 훑는 것만으로도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있다. 이 책들이 누군가 자신의 기준대로 선택해가며 끊임없이 읽어온 책이라는 것과 한 명의 독자가 여기 또 있었다는 것을. 몇 권의 책의 분야가 겹치고 또 흩어지면서 남겨진 흔적은 한 애독자가 내게 보내는 신호 혹은 암호처럼 느껴진다. 책들을 훑어보다 보면 한 가지 일관된 장르를 따라 읽어온 굵직한 계보가 있는가 하면 나무의 잔가지처럼 의문부호를 가지게 하는 이색적인 장르의 책들도 있다. 이렇게 한 사람의 서가에 보관된 책은 헌책방이나 서점에 들어찬 책과도 다르고 도서관에서 처럼 일관된 분류코드로 나열되어 있는 책과도 다르다. 그게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한 사람을 끊임없이 생각하게 한다.

감상은 여기까지.

짤막한 인사를 건네고 나면 본격적인 노동의 시간이다. 가족들이 묵묵히 지켜보는 가운데 책장의 책을 일정한 양만큼 꺼내 최대한 빠른 속도로 정리해간다. 이건 거래이고, 나는 한 독자를 위한 헌사나 감상을 늘어놓기 위해 여기 온 것이 아니다. 유족들은 더 이상 읽을 리 없는 상당한 자리를 차지하면서 끊임없이 먼지를 일으키고 있는 이 책들을 하루 빨리 정리하길 원하고, 나는 그러한 뜻에 부응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니까. 그러므로 내가 해야 하는 일은 감상에 빠져 시간을 지체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숙달된 모습으로 책을 정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한 가족에게서만 일어나는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듯이 행동하는 것이다.

손이 바쁘게 움직이는 와중에 간간히 오가는 대화 그리고 침묵. 그리고 그의 독서를 인정하는 몇 마디 말을 가족들에게 건넨다. 나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느니, 고인의 신상에 호기심을 갖기보다 이 순간 가장 필요한 말이 그 몇 마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제대로 책을 읽어왔다는 것을, 그것은 물론 헌책방 운영자 나부랭이가 판단할 수 없는 것이지만 마지막으로 가족들이 듣고 싶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말을, 내가 아는 책이 눈에 띄면 간간히 하게 된다.

정리를 마치고 값을 치른 후 헌책방으로 돌아와 매입해온 책들을 꺼내 본격적인 정리를 시작하면 한 독자라 지칭했던 이 책들의 주인 되는 사람의 이름은 세 권만 들춰봐도 알 수 있다. 책배 혹은 책 내지에 기록된 이름, 그리고 구매한 서점과 날짜를 기록한 정보들이 연이어 발견된다. 대학가, 시내의 서점에서 보낸 그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을까? 그가 늘 가던 곳은 서점 안에서도 가장 구석진, 베스트셀러라고는 한 권도 보이지 않는 그런 자리에서 책을 골랐을 것 같다. 또 어느 면지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이 책은 나의 외삼촌께서 주신 용돈으로 구입한 책이다. 여기에 그 분의 고마운 뜻을 새겨 두고 잊지 않으려 한다.”

이러한 자필 메모가 책 속에 남겨져 있다는 것은 감동적인 측면이 분명히 있다. 한 사람이 흔적을 남긴 책들을 보며 그 사람을 상상하는 일은 책을 읽을 때, 특히 소설을 읽을 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듯이 한 사람의 독서 리스트와 흔적은 타인의 삶과 독서가 통째로 녹아있는 그 자체로 한 권의 책이다. 그어놓은 줄, 짧은 메모 그리고 떨리는 손에 힘주어 쥔 연필로 여백에 남긴 물음들로 이루어진 한 사람의 생과 끈끈하게 이어져 있던 개인적이고도 농밀한 책.

이렇듯 어떤 헌책들은 버려진 책이 아니라 너무 소중해서 끝까지 남겨진 책이다. 한 사람이 생을 다할 때까지 놓치고 싶지 않았던 책들의 묶음인 셈이다. 그리고 그 거대한 책은 그 사람의 죽음 이후에 헌책이 되어 실이 풀리듯 다시 각각의 책이 되어 낱권마다 새로운 독자를 찾아 제각각 흩어질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사람의 이름을 잊지 못한다. 한 독자였던 그 이름 석 자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