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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
도예를 하며 생각한 것 - 1
series
김현영
에세이
... 한국

들어가는 글

나의 글을 공유하기 전에 어떤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이곳, 벗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밝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들어가는 글’을 쓰기로 했다.
나는 평소 작품을 감상하는 데 있어, 작가의 의도는 관람자에게 있어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 왔다. 나 또한, 작품이라는 것은 태어나고 나면, 독립적인 개체가 되어서 부모의 품을 떠나 자신만의 시간과 역사를 가지게 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태어난 것들은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 왜 이곳에 존재하게 되었는지 질문하는 존재이므로, 나는 내 작업들을 대변하기 위해 내 생각의 일부를 공개해야 할 의무를 느끼고 있었다.

나는 2015년부터 도자를 다루어 왔고, 약 10년 정도 되었다. 내 작업 환경은 한국을 기반으로 교육받아 온 95년에 태어난 여자 사람의 시각과 관심이 투영되어 있을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자유와 연민이다.

도예라는 분야는 석회석, 규석, 장석, 산화철, 산화동 등, 땅속 깊은 곳에서 오랜 시간을 거쳐 형성된 광물질과 산화물에서 출발한다. 사물을 구성하는 재료의 원산지, 제작 방법, 유통과정이 점차 생략되어 가는 오늘날의 사회 속에서, 재료부터 제작 방법까지 독자적으로 물질을 연구하고 만들 수 있는 이 매체는 나에게 자유와 윤리적인 감각을 익히게 하였다. 나는 그것이 시대 언어로 작동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학생 시절부터 점토와 유약이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세세한 층위에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온도에 의해 변화하는 물질의 성질, 즉 화학적 반응에 주목했다. 그것은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형상과 색감, 질감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현상들은 대체로 나에게 ‘우연’이라는 감각을 불러일으켰고, 내가 직접 감각할 수는 없지만 세계를 구성하는 어떤 절대적인 공식이 존재한다는 느낌을 주었다. 나는 그 숨겨진 공식을 현상으로 드러내는 과정 속에서 발견의 희열을 경험했다. 우리가 ‘우연’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주는 경이로움과 놀라움, 신기함은 그 원인을 명확히 알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극적으로 느껴지며, 이러한 감각은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가는 한 계속될 것이다.

도자를 통해 감각하게 된 우연은 나의 탄생에서부터 주변인들과의 만남, 때로는 연인, 뉴스 기사, 전쟁, 질병, 죽음에 이르기까지 세계와의 연결로 확장되었다. 광물질과 산화물을 반죽하고 구워내며 발견한 화학적 결과물들은, 세상을 이루는 모든 것이 화학 물질, 즉 원소로 이루어져 있음을 상기시켰다. 이러한 감각은 영원히 존재할 것처럼 여겨지던 무생물에 대한 나의 인식을 확장시키며,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 속에서, 서로 반대된다고 여겨지는 개념들까지도 함께 포괄하며, 나는 일상과 작업 속에서 느낀 것들을 비공식적인 글로 써두기 시작했다. 감사하게도, 이러한 날것의 글들에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내주시며 이곳에서 공유해보자는 제안을 주셨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혼자였다면 계속 미루었을 글들을 모아 정리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쓰인 지금의 글들 역시 함께 나누며, 이 공간을 작업의 동반자이자 긴 시간을 가로지르는 소통의 장으로 만들어가고자 한다.

끝으로, 현대의 초연결 시대에 어떤 경위로 이곳에 이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간과 공간을 넘어 이루어진 이 만남이 또 다른 우연을 낳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 글은 짧은 문장으로 연도, 주제와 관련 없이 1, 2, 3의 형태로 기록한다.
  • 제목 <도예를 하며 생각한 것>은 평소 팬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자서전 제목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에서 영감받았다.
  1. 흙은 나에게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궁금하게 했다. 처음 점토를 만지고, 그것을 구웠을 때, 나와 세계 사이에는 인지 불가능한 영역이 있음을 느꼈다. 그 미지의 영역은 신의 공식 같았다. 나는 불에 굽기 전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인지 불가능한 영역을 넘어서 다시 인지 가능한 세계로 회귀하는 우리 세계. (2024.01.10)
  1. 잠을 자다 보면, 소위 가위라는 것에 눌릴 때가 있다. 눈을 감고 있는데, 내 방의 공간이 보인다거나 아무도 없는데 꿈속의 대상이 나를 쓰다듬는, 촉각적인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이것은 특히 낮잠을 잘 때 많이 일어난다. 꿈속에서 일어난 일은 금방 사라진다. 갓 깼을 때의 선명함은 사라지고, 무거워진 머리로 공기를 가르며 일어난다. 꿈속에서도 난 혼자가 아니다. (2025.05.28)
  1. ‘우주의 본성은 우주의 질료를 밀랍처럼 사용해서 이번에는 말을 만들었다가, 조금 후에는 그 말을 녹여서 그 질료를 가지고 나무를 만들고, 그 다음에는 다른 어떤 것을 만든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오직 아주 짧은 기간 동안만 존재한다. 상자를 조립하거나 부수는 것은 상자 자체에게 괴롭고 힘든 일이 아니다.’ _명상록 7권 23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Nature takes substance and makes a horse. Like a sculptor with wax. And then melts it down and uses the material for a tree. Then for a person. Then for something else. Each existing only briefly. It does the container no harm to be put together, and none to be taken apart.’ _ Meditations (Marcus Aurelius)

    잠들기 전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펼쳤는데, 오늘은 이 문장이 눈에 밟힌다. 가끔 같은 작업을 여러 번 굽게 될 때가 있다. 그러면, 그것은 처음과는 다르게 변한다. 처음에 눕혀서 구운 것을 세워서 구우면 다른 형태로 변한다. 레시피를 통해 작품을 굽는다고 해서 그것이 항상 이전과 동일한 형태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이미 완결되어 보이는 것도, 부수어서 다시 구워낼 수 있다. 이 무한한 가능성의 굴레에서 나 자신도 한낱 질료라는 것에 나는 어떤 성질을 가지고 태어났는지 자문하게 된다. (2025.06.18)

  2. 2024년 올해 8월은 소나기나 여우비 같은 갑자기 내리다가 그치는 비들이 잦았다. 맑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들을 우리는 맞이했다. 한 번은 고속도로를 탔는데, 터널의 전후로 세찬 비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세찬 비든, 가벼운 여우비든, 이 예상치 못한 자연 현상은 나의 촉각을 곤두세우게 했다. 나를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2024.08)

  3. 2년 전 선물로 받았던 뱅갈나무가 잎사귀를 셀 수 없을 만큼 성장했다. 굵은 가지 뿐이었던 자리에서 잔가지들이 생겨났다. 위로 자라게 하려면, 잔가지를 쳐내야 한다고 했는데, 내 손으로 부서뜨리려니 영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 내버려 두었다. 여기저기 잔가지들이 풍성해져서 모양새가 희한해 졌다. 길들여지지 못한 나무는 집 안에서 자신의 야생성을 공고히 하며, 영역을 구축해 나가고 있다. 실제로 통행을 방해할 정도로 풍성해졌다. (2024.05.01)

  1. 최근 우리의 대화에서 그는 말했다. ‘…태어났다는 건 사실, 나는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 더군다나 그것은 내가 선택한 일이 더더욱 아니고, 자연스레 그런 일이 벌어진 것뿐이야.’ (2024.05.03)
  1. 흙은 굉장히 영적인 물질이다. 흙은 훗날 내가 죽어서 땅에 묻히면, 그 주변의 유기물들과 합심하여 내 존재를 자연스럽게 이 세계의 순환 체계 안으로 편입시켜 줄 것이다. 아마, 그때가 되면 나는 내 이름의 무게를 내려둘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부르는 땅과 사람, 나무, 하늘 이 모든 것이 순간적인 명칭일 뿐이다. 그러나, 내가 당신을 부르고, 찾아내고, 알아볼 수 있는 이름의 무게가 당신이 여기 있음을 알게 해주니, 내가 지구에 사는 동안에는 무게가 있는 것이 중요하다. (2024.05.05/2026.02.21(수정))

  2. 흙의 영적인 능력은 자아를 놓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는 우연성을 동반하여 나를 세계와 분리시킨다. 우리는 서로 조율을 잘하고 있는 듯해 보이지만, 난 항상 지고 있으며 흙에 순응하고 그가 보여주는 참신함에 동조한다. 신기하게도, 내가 지고 있는 그 상황에서 나의 천진난만함이 찾아온다. 내가 나를 인지하지 못할 때 말이다. 우연히 벌어진 일로 인식되는 것은 항상 앞서 나가 있다. 그래서 작업은 항상 나보다 빠르다. (2024.05.08)

  3. 스무 살 초반의 나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문장을 좋아했다. 10년이 지난 지금의 나는 스탕달의 ‘살았다, 썼다, 사랑했다.’가 좋다. 자아와 타자,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자연,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은 인간인 나의 몸에도 존재한다. 그것은 ‘숨’이자 ‘땀’이자 ‘심장이 뛰는 것’이며,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이 나를 살아가게 한다. 태어나기 전부터 정해져 있었던 내 이름의 무게를 다 소진하기 전까지 벗어날 수 없는 자아는 사는 동안 계속해서 세계와 충돌한다. 우리 인생의 여백은 어린 시절과 밤과 고향에서부터 그 순수함과 천진난만함 속에서 피어난다.
    나의 작은 작업이 이 세계에서 작은 영토를 획득할 수 있다면, 그 세계는 자아의 쉼이 존재하는, 활동하는 데 있어 ‘나’를 잃어도 아무 문제없는 그런 장소이길 바란다. 하지만, 내 이름의 무게는 너무나 강력해서 세상과 마주하는 모든 일에서 ‘나’는 더욱 선명해지고, 분명해진다. 그래서, 사람은 종종 그 잔혹함에서 스스로를 잃기 위해 술이나 여행을 가는 것이다.
    ‘우연’은 탄생, 충동, 충돌, 만남, 인연, 발견, 계기, 부름과 같다. 우연은 눈에 보이지 않던 일이 가시화됨으로써 계시적이다. 그것은 드러남으로 인해서 운명론에 다가간다. 알 수 없는 세계의 탄생 비화처럼 자아와 자아를 둘러싼 환경을 이어주는 징검다리로서 작업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한 계시와 부름에 대한 표현 재료로써 흙이 가진 커다란 품을 보았다. (2024.05.08)

  1. 오늘은 유약 실험을 위해 약 50여 개의 시편을 제작했다. 시편은 시중에서 판매되는 백자토로 만들었다. 오랜만에 내가 직접 배합한 흙이 아닌, 쫀득쫀득한 잘 배합된 점토를 만지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도자를 시각적 매체로만 다루는 것은, 어쩌면 도자를 절반만 사랑하는 일이 아닐까. 최근에는 2024년에 제작했던 시계 작업을 다시 이어가고 있다. 당시의 시계는 입체라기보다 평면에 가까운 형태였지만, 지금의 작업은 보다 입체적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침과 분침은 여전히 흐릿하다.
    나는 이 시계를 떠올리다가, ‘보이지만 읽을 수 없고, 존재하지만 만질 수 없는’ 상태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점자를 떠올렸다. 점자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를 촉각으로 매개하는 언어다. 만질 수 있고, 만져도 되며, 닳아 없어지기보다는 오히려 더 많은 접촉과 관계를 통해 의미가 생성되는 표면. 이러한 감각의 층위를 도자라는 물질을 통해 구현해볼 수 있지 않을까. (2026.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