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but)을 시작한 세연님은 3년 전쯤 처음 만났다. 문화비축기지와 일을 하며 세연님을 기획자로 만나고 몇 번의 작업을 같이 하면서 그녀가 인류학을 전공한다고 알게 되었다. 해녀를 주제로 준비하던 세연님의 리서치 자료와 글1을 보며 이런 자료를 편하게 보면 좋을 텐데 정도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작년 말 벗.(but)이 이름도 없을 때 세연님에게 글을 기고하는 플랫폼 제작을 부탁하고 싶다고 연락을 받았다. 돈도 안 될 것 같아서 디자이너로 참여하는 것보다, 동시대에 작업을 하는 사람으로 글 쓰는 사람들, 기획자들과 친해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한 명의 ‘벗’으로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내가 어느덧 40대가 되었고 세연님과 또 다른 운영자인 혜윤님이 30대니까, 20대도 있으면 좋겠다는 단순한 생각에, 프로그래밍을 한 종류의 글쓰기로 생각하는 창인님이 떠올라 함께 피자를 먹고 또 벗.(but)이 되었다. 한 사람은 미국, 한 사람은 일산, 두 사람은 연신내 어딘가에서 틈틈이 줌에서 만나, 바빠서 미처 일을 못 했다는 민망한 인사로 시작하던 모임이 어느덧 모여서 첫 발행을 하게 되었다.
불특정 ‘벗’으로부터 기고를 받으면 큰 문제가 없는 한 별다른 제약 없이 플랫폼에 싣는다는 운영 방식은 벗.(but)의 정체성이 특정 주제나 담론보다, 글을 수집하는 기록의 형태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각 지역에서 현장에 있는 사람의 시선으로 기록하는 글이 주는 생생함이 마음에 들었다. 인공지능으로 생성되는 수없이 많은 이미지와 정보 사이에 이런 종류의 글이 얼마나 힘이 있을지 회의적인 마음도 들지만 작업하며 틈틈이 보았던 다른 ‘벗’들의 기록2을 보며 가본 적 없는 인도네시아 숲속의 선교사 마을 이야기에 쉽게 빠져들었다.
먼 시간이 지나고 한 문명이 유물이 되어 전해진다면 어떤 텍스트가 살아남을까. 에레즈 에이든과 장바티스트 미셀은 『빅데이터 인문학』3의 서두에서 인류 역사에서 오래 그리고 많이 살아남은 기록은 영수증이라고 언급한다. 경제활동의 과정에서 생겨나는 부산물로서의 수많은 기록 유물은, 문자의 기록으로서의 기능을 중요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이 기록이 상징하는 것은 상호 이해당사자 간의 증표, 혹은 신뢰로 읽히는 것은 자연스럽다.
인공지능의 가장 기본적인 언어 모델은 통계학을 기반으로 한다. 문장에 들어가는 단어는 무한한 경우의 수가 있지만 한 단어 뒤에 오는 혹은 앞뒤로 조합되는 퍼즐로 보면 그 경우의 수가 급격히 낮아지면서 단어 조합의 통계를 통해 문맥과 상황에 맞는 문장이 만들어진다. 질 좋은 데이터가 많아질수록 인공지능의 신뢰도는 올라가고, 지금은 인공지능에 의지하는 상황이 익숙하다. 그런데도 그 문장을 보고 있으면,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한 감각은 좀처럼 붙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인공지능을 하나의 존재로 바라보기는 하지만 어딘가 비어 있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다. 어떤 식견이나 지식을 근거로 말하는 건 아니고 그냥 느낌이 그렇다. 나에게 친절하고 필요에 따라 냉철한 조언자이자 배려심 넘치는 위로자인데, 이 자유로운 태세 전환이 인간적이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 이 이질적 감각은 인간적이지 않은 감각 이전의, 동물이나 생물적이지 않다는 감각에 가까운 것 같다. 대화하는 상대와 눈을 맞추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허공을 바라보며 말하는 기분. 이 감각은 인공지능이 개별 사물로 들어오면 점점 사라질 것 같다.
신뢰성의 이야기로 돌아오면 자잘한 오류나 할루시네이션 같은 문제를 차치하고 인공지능이 주는 신뢰는 인류가 모은 빅데이터의 양과 시간에서 오는 것이지 인공지능의 언어에서 전해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 언어와 문장이 연결하는 물성과 주체가 있다면 인공지능을 더 생생한 존재로 느끼지 않을까.
반대로 한 인물의 명료한 말이 주는 신뢰성의 문제도 생각해보게 된다. 특정 대중의 필요와 요구를 뚜렷하게 대변하며 확신에 찬 연설로 연임한 미국 대통령의 말과 행동을 근래 들어 더 자주 접하게 된다. 몇몇 정치평론가와 지식인들은 그의 숨은 뜻을 해석하며 깨우침을 주기도 하지만, 다음 날이 되면 그 해석이 무색해지는 순간이 반복된다. 너무 넓은 지정학적 요소와 복합적인 이해관계를 동시에 대변하다 보니, 그 발화는 점점 개인의 언어라기보다 하나의 거대한 ‘말’로 흘러간다. 말하는 사람은 분명히 있는데, 그 말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는 점점 흐릿해진다. 혼란스러운 경외심마저 느껴진다. 어떤 의미로 그는 신이 되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내 두 발로 땅 위에 서 있다는 감각은 그 자체로 존재에 대한 감동을 준다. 올해 1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다보스 포럼에서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의 담담한 연설이 인상 깊다. 연설의 서두에 그는 ‘power of the powerless’3를 언급하며 그 힘의 시작을 honesty라고 말하며 연설을 시작했다.4 현재 캐나다의 경제적, 정치적 상황을 전하며 중견국으로서의 위치와 역할을 분명히 하는 그의 말은 앞선 장면과는 다르게 또렷한 좌표를 갖고 있었다. 그의 연설에서 신뢰가 느껴지는 이유는 그 말이 대변하고 있는 대상과 범위가 명확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수많은 정보와 이미지 사이에서 ‘벗’의 기고글이 쉽게 읽혔던 이유는 그 글이 어떤 자리에서 쓰였는지가 분명하게 느껴졌기 때문인 것 같다. 글의 내용이나 형식이 아니라, 그것을 말하고 있는 화자의 경험과 상황 위에 전달되는 글의 무게가 진정성 있게 다가온다. 현장에서 발화되는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린다. 내가 어디에 서서 이 말을 하고 있는지가 분명할 때, 언어는 다시 몸을 갖는다. 벗.but.벗이 그런 언어들이 머무는 자리가 되었으면 한다.
2026.04.14
정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