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 EN
2026.05
이미 갱신된 나: 감각의 자동화와 행위의 위탁에 대한 노트
황인규
필드노트
...

내가 접하는 세계가 나를 닮은 형태로만 되돌아온다는 감각이 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익숙하게 떠올릴 법한 감각일지도 모르겠다. 낯선 것보다 익숙한 것이 먼저 도착하고, 반박보단 동의가 먼저 준비되어 있다. 그것은 대개 친절한 형태로 다가온다. 그것이 나의 취향인지, 내가 살고 있는 환경이 나의 취향을 먼저 만들어 놓은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자연스럽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친절함이 나를 넓히기보다 조용히 좁히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전시 《서울융합예술 페스티벌 언폴드엑스 2025 Let Things Go : 관계들의 관계》 전경 사진
전시 《서울융합예술 페스티벌 언폴드엑스 2025 Let Things Go : 관계들의 관계》 전경 사진

나는 그 감각을 알고리즘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사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더 넓은 환경이다. 검색 플랫폼의 질서, 추천과 광고의 유도, 플랫폼이 설계한 상호작용의 규칙, 그리고 내가 속한 사회의 규범까지. 이 환경은 나에게 특정한 의견을 강요하진 않는다. 대신 내가 무엇을 자연스럽다고 느끼는지, 무엇을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지, 무엇을 시간 낭비로 밀어내는지 같은 감각의 문법을 조용히 재배치한다. 정보의 총량이 늘어난 것과 별개로, 내가 실제로 마주치는 세계의 스펙트럼은 좁아지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폭이 줄어드는 방식은 대개 부드럽고, 속도는 빠르다. 그래서 더 잘 보이지 않는다.

시스템과 나의 관계는 감정만이 아니라, 감정이 나를 몰아넣는 반복행동의 형태로 드러난다. 내용을 듣다가 문득 거부감이 들면, 나는 이미 손가락으로 화면을 넘기거나 검색 버튼을 누르고 있다. 건너뛰기는 싫다기보다 시간 낭비라는 감각으로 정당화되고, 남은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잠깐 궁금해하다가도 곧 다음 영상에 시선이 붙는다. 때로는 영상 자체보다 먼저 댓글창으로 내려가 내가 느낀 불편함을 누군가의 문장으로 확인한다. 그런 문장을 발견하면 안도하고, 그 안도는 다시 내가 무엇을 끝까지 볼지 결정한다. 또 어떤 날에는 여러 검색 결과를 탭으로 띄워두고 읽지만, 설득력을 얻는 탭은 오래 살아남고 그렇지 않은 탭은 금방 닫힌다. 그 수명은 정보의 질이라기보다 내가 ‘읽을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에 의해 정해지고, 그 기준 또한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부터 이런 습관이 생겼는지 명확하진 않다.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떠올리려 해도 분명하지 않다. 다만 확실한 건, 낯선 것을 견디는 시간이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어느 시점부터 추천은 내가 평소 말하고 보고 머물렀던 것을 반영하여 더 비슷한 방향으로 굳어졌다. 이런 현상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첫 감정은 거부감이었고, 그 다음엔 의심이 왔다. 내가 지금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확장인가, 아니면 굳어짐인가.

물론 확증편향 자체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인간은 원래 익숙한 해석을 더 빨리 받아들이고, 기존의 판단을 지지하는 단서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내가 불안했던 것은 편향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그 편향이 플랫폼의 추천 구조와 결합할 때 나타나는 속도와 반복의 밀도, 그리고 자동화의 방식이었다.

인간이 학습을 통해 변한다는 것은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는 언제나 관계 속에서 변화하고, 변화하며 관계를 만든다. 내게 문제처럼 느껴진 것은 변화의 사실 자체보다, 그 변화가 체감되기 전에 이미 습관의 형태로 굳어 있는 순간들이었다. 내가 어떤 것에 노출되고, 무엇을 반복하고, 무엇을 생략하는지가 너무 매끄럽게 정리된 뒤에야 그것을 알아차리는 순간들. 그때부터 변화는 스스로 만든 경로라기보다, 이미 깔려 있는 레일 위를 움직이는 느낌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감각은 단지 의견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가치 있게 느끼고 무엇을 빠르게 지나치는지에 대한 판단의 리듬 자체가 바뀌고 있다는 의심으로 이어졌다.

스키마는 단지 머릿속 생각의 틀이라기보다, 무엇을 가치 있게 느끼는지, 무엇을 의심하는지, 무엇을 빠르게 지나치는지 같은 지각과 판단의 습관을 포함한 몸의 문법에 가깝다. 우리는 각자의 스키마를 가지고 살고, 그 스키마는 관계를 통해 계속 갱신된다. 문제는 지금 그 갱신이 너무 빠르고, 너무 좁은 경로로 반복된다는 감각이다. 내가 보고 클릭하고 머무는 동안, 환경도 함께 학습하고 있다는 느낌. 나는 세계를 배우는 줄 알았지만, 나를 감싸는 세계도 나를 배우고 있다. 모호하게도 반복은 나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부터 나는 시스템의 주체성을 가정해보기 시작했다. 내가 말하는 시스템의 주체성은 의식의 유비가 아니라, 세계를 구성하는 비인간적 행위성에 대한 가정이다. 인간만이 세상에 영향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면, 내 주변의 알고리즘, 플랫폼과 같은 시스템이라는 비인간은 나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이 가정이 내가 처한 상황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인지하기 위한 렌즈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내 탓’과 ‘사회 탓’ 사이에서 감정만 맴도는 대신, 관계가 어떤 메커니즘으로 나의 스키마를 갱신시키는지, 그 갱신이 어떤 속도와 폭으로 이루어지는지, 그리고 내가 그 과정을 얼마나 알아차리지 못하는지를 보고 싶었다.

이 관계는 늘 한 방향이 아니다. 어떤 순간에는 시스템이 나를 아래에 두는 것처럼 느껴지고, 어떤 순간에는 내가 시스템을 도구처럼 다루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생태계라고 불러왔다. 다만 이 생태계가 완전히 중립적이지 않다는 감각도 함께 있다. 데이터를 수집하는 쪽과 데이터를 남기는 쪽, 인센티브를 설계하는 쪽과 그 인센티브를 취향으로 착각하게 되는 쪽. 무엇보다 규칙을 바꾸는 쪽과 그 규칙에 적응하는 쪽이 분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생태계는 완전히 대등하지 않다.

이런 감각에서 나는 작업을 시작했다. 내가 받아들이는 정보가 어떤 경로를 거쳐 나에게 도착하는지, 내가 가진 확신이 어떤 반복과 생략을 통해 강화되는지, 그리고 내가 무엇을 검토하기도 전에 ‘자연스럽다’고 받아들이게 되는지를 점검하고 싶었다. 그래서 때로는 일부러 다른 의견과 관점을 찾아보려 해보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서 작은 모순이 생긴다. 자동화를 점검하려는 의지 자체가 다시 플랫폼을 통과한다. 더 넓게 보려면 더 많이 검색해야 하고, 더 많이 검색할수록 더 정교한 추천이 따라온다. 검증하려는 마음이 검증 장치에 더 깊게 기대는 역설. 나는 이 역설을 해결하고 싶다기보다, 그것이 내 삶에서 어떤 감정의 형태로 나타나는지를 기록하고 싶었다. 저항, 안도, 피로, 그리고 “내가 나를 점검하기 전에 이미 갱신된 나”라는 이상한 불일치감.

그리고 최근, 나는 관계의 성격이 또 한 번 바뀌고 있다. 관계는 더 이상 나를 설득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이제 관계는 내가 무엇을 할지 ‘권유’하는 수준을 넘어, 무엇을 대신 하겠다고 제안한다. 생각해보면 감각의 자동화와 행위의 자동화는 분리된 단계가 아닐지도 모른다. 무엇이 자연스럽고, 효율적이며, 검토할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판단의 리듬이 먼저 자동화될수록, 실행을 대리 시스템에 넘기는 결정 또한 저항 없이 이루어진다. 설득의 자동화가 먼저 오고, 그 다음에 실행의 자동화가 들어온다. 그 순간부터 나의 역할은 ‘행위자’에서 ‘승인자’로 옮겨가기 시작한다.

최근 Reddit에서 화제가 된 “OpenClaw”라는 AI 에이전트를 간간히 실험해보고 있다. 휴대폰 메시지 하나로 메일을 보내게 하거나, 노션을 열어 메모를 정리하게 시켜보았다. 편리하다는 감각은 분명한데, 내 할 일이 줄어든 만큼 내가 승인해야 할 일은 늘어난다. 결과가 빠르게 도착할수록 내가 그 결과를 판단하는 기준은 오히려 얇아지는 것 같아 불안하다. 이전에는 내 사고가 조정되고 있다는 감각을 경계했다면, 이제는 행위성까지 위탁되는 시대가 다가온다. 자연어로 지시하면 실행이 따라오고, 내가 직접 수행하지 않아도 결과가 생성되는 흐름. 편리함은 매끄럽고, 불안은 뒤늦게 온다.

아직 이런 행위의 위탁은 일상의 전반이 아닌 일부 영역으로 흘러들어온 것처럼 보인다. 단적으로 자율주행 같은 사례만 보더라도, 행위 위탁은 이미 시작되었다. 이때 위탁은 일을 대신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나의 위치를 바꾼다. ‘하기’에서 ‘확인하기’로, ‘수행’에서 ‘승인’으로. 처음에는 중간 승인자로, 이후에는 더 거시적인 최종 승인자로. 역할이 위로 이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위로의 이동이 반드시 주체성의 확장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과정의 성취가 사라지고 결과의 책임만 남는 자리일 수도 있다.

모두가 비슷한 도구로 비슷한 조언을 받는다면, 승인자들 사이의 차이는 무엇으로 남을까. 경험의 차이인가, 기준을 만드는 능력의 차이인가, 혹은 권한을 부여하는 습관의 차이인가. 그리고 사고와 행위를 모두 위탁한다면, 개인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에게 남는 역할이 책임의 보관함, 최종 승인자라면, 그 삶은 경험과 과정의 서사를 유지할 수 있을까.

더 무서운 것은 그 모든 행위가 로그로 남는다는 점이다. 로그는 단지 기록이 아니라 설명이 된다. 기록이 설명이 되는 장면은 몇 번씩 겪어본 일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설명하기보다 내가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하는지 나의 기억보다는 기록을 먼저 떠올릴 때가 있다. 그리고 최근에 ChatGPT에게 “나의 저주를 알려달라”, 혹은 “나의 약점과 보완점을 알려줘”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 유행처럼 지나갔다. GPT를 자주 사용하는 나와 내 지인도 해보았고, GPT는 서로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장면에서 이상한 공포를 느꼈다.

인간은 고정된 속성의 묶음이라기보다, 시행착오와 망설임과 우회를 포함한 ‘되기’의 상태로 살아간다. 우리는 어떤 결론으로 수렴하기보다, 여러 방향으로 흔들리며 자신을 만든다. 그런데 로그 기반의 자기 이해는 그 흔들림을 설명 가능한 조각으로 잘라 분류하고 예측하는 방향으로 눌러버릴 수 있다. 내가 나를 설명하기 전에, 기록이 나를 설명하는 세계. 내 스스로가 나를 가장 잘 아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이 나를 가장 잘 아는 세계.

내가 두려운 것은 기록 자체가 아니라 설명권을 잃는 것이다. 설명되지 않을 권리. 인간은 복잡하고, 스스로도 모르는 것들을 더듬으며 성장한다. 그래서 나는 작업에서 매끈한 수행보다 실패와 어긋남을 남겨두려 했다. 불완전함은 미학이면서 동시에 윤리였다. 완전히 설명될 수 없다는 사실을 견디는 형식. 내가 나로 남아 있기 위한, 작고 불편한 장치.

언제나 그랬듯, 나는 변화에 적응할 것이다. 하지만 적응이 곧 무사함을 뜻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내가 쓰는 이 글도 결론이 아니라 점검일 것이다. 내가 어떤 환경과 어떤 관계 속에서 어떤 속도로 갱신되고 있는지, 그리고 그 갱신이 내 감각과 내 작업의 형식에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 세계가 나를 닮아오는 것인지, 내가 세계를 닮아가고 있는 것인지, 그 경계가 흐려질수록 나는 더 자주 질문하게 된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불일치는 내가 느끼는 것일까, 아니면 승인하며 느끼게 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