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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
NPC는 누구의 친구입니까
김새솔
필드노트
...

*이 글은 글쓴이의 실제 작업 경험을 바탕으로 하되, 회사와 캐릭터에 관한 세부는 익명화하였다.


게임 시나리오 라이터로 일하면서 가장 자주 받는 질문은, 사실 질문이라기보다 확인에 가깝다.

“그러면 그… 캐릭터 대사 같은 거 쓰는 일이죠?”

그렇다고 답하면 사람들은 안심한다. 안심하는 얼굴을 보면 나도 안심한다. 정확히는, 안심하는 척한다. 왜냐하면 그건 절반의 진실이고, 그 절반이 가리는 다른 절반이, 내가 이 일을 하면서 가장 자주 마주하는 곤란이기 때문이다.
대사를 쓴다. 맞다. 그런데 더 자주 하는 일은 대사를 자르는 일이다.

한때 몸담았던 프로젝트의 시나리오 작업에서, 한 챕터를 30장에서 10장으로 압축해야 했던 적이 있다. 이유는 단순했다. 출시 일정. 그 챕터의 주인공인 캐릭터 T는 회사가 IP의 중심 인물로 키우려던 캐릭터였다. 그는 어린 시절 가족을 잃었고, 한 인물의 도움으로 간신히 탈출했다. 그 도움을 준 인물은 이후 그의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악인이 되어 돌아온다. T는 평생을 이렇게 믿으며 살아간다.

‘내 목숨은 그자의 농담이었다.’

30장 분량의 스토리에서, 이 믿음은 후반부의 한 장면에서 무너진다. T는 우연히 옛 기록을 마주하고, 자신의 탈출이 그 악인의 자비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장면은 한 인간이 평생 자신의 생존을 어떻게 해석해왔는지, 빚으로, 굴욕으로, 운명의 농담으로, 그 해석 자체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가 평생 가졌던 자기혐오와, 살아남았다는 부채감, 그자를 향한 뒤틀린 집착이, 모두 잘못된 토대 위에 지어진 집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하지만 이 장면은 잘렸다.

자르는 결정은 점심 시간 직후의 회의실에서 이루어졌다. 누군가 ‘일정에 비해 분량이 너무 길다’라고 말했고, 다른 누군가 ‘이 장면을 빼도 플롯에는 문제 없다’고 말했고, 또 다른 누군가가 ‘유저가 이걸 다 읽을까?’라고 말했다. 셋 다 맞는 말이었다. 나도 동의했다.

시나리오 라이터의 일에는 자신의 글을 변호하는 일과 동시에 자신의 글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일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 두 가지는 같은 회의실에서, 같은 입으로, 같은 시간에 수행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의 인식 전환을 다른 방식으로 처리했다. 짧은 회상 컷, 한두 줄의 대사, 간접적인 언급. 정보값은 전달된다. 플롯은 굴러간다. 유저는 T가 진실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안다.

분명 무엇 하나 빠진 게 없는데, 어딘가 빠져 있다.

압축이 끝나고 챕터가 출시되었을 때, T는 여전히 T였다. 유저들은 그를 좋아했다. 팬아트가 올라왔고, 캐릭터 인기 투표에서 상위권에 들었다. 회사 입장에서는 성공한 캐릭터다. 내 입장에서도 직업적으로 잘 마무리한 작업이었다.

그런데 나는 가끔 그를 생각하면 어딘가 빚진 기분이 든다. 정확히 말하면, 30장에 살아있던 T와 10장에 살아남은 T가 같은 인물인지 잘 모르겠다는 기분. 둘은 같은 이름을 쓰고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한쪽은 자기 인생의 토대가 무너지는 그 한 장면을 통과한 사람이고, 다른 한쪽은 그 장면을 짧은 회상으로 ‘전달받은’ 사람이다.

진실이 정보로 도착하는 것과 진실이 사건으로 도착하는 것은 다르다. 사건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통과되는 것이고, 통과되는 동안 통과하는 자의 몸과 시간을 빌려 자신을 실현한다. 정보는 부착되지만 사건은 변형시킨다.

30장짜리 T에게는 그 진실을 통과할 며칠의 시간이 주어졌을 것이다. 그는 부정하고, 분노하고, 무너지고, 다시 일어났을 것이다. 그 며칠 동안 그의 자기 이해가, 그의 분노의 방향이, 그가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 자체가 다시 배치되었을 것이다. 10장짜리 T는 그걸 두 컷 사이에서 통과한다. 정확히는, 통과하지 않는다. 그는 진실을 ‘받는다’. 받은 진실은 그에게 부착될 뿐, 그를 변형시키지 못한다.

이건 T의 문제가 아니다. T는 코드와 텍스트로 이루어진 존재고, 시간을 경험하지 않는다.

이건 내 문제다.

나는 그에게 무너질 시간을 주고 싶었던 사람이었고, 그걸 주지 못했다.

게임 시나리오 라이터의 일을 설명할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이 이런 것이다. 우리는 캐릭터를 만든다. 만들지만 소유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을 사랑한다. 사랑하지만 살려둘 권한이 없다. 우리는 그들의 인생을 설계한다. 설계하지만 그 설계가 출시되는 순간 우리는 그것에 대해 더 이상 발언권을 갖지 않는다.

T는 내 캐릭터다. 내 캐릭터인데, 정확히는 회사의 IP고, 더 정확히는 기획, 일러스트, 연출, 그 외 무수히 많은 다른 팀과의 공동 산물이고, 가장 정확히는 그를 키운 유저들의 것이다. 나는 그에게 어떤 말을 시킬지 결정했지만, 그에게 어떤 사건이 일어날지는 절반만 결정했고, 그 사건이 며칠에 걸쳐 일어날지 두 컷 사이에서 일어날지는 결정하지 못했다.

캐릭터는 그릇이 아니라 여러 힘이 모여 만들어진 매듭에 가깝다. 데이터, 일정, 테이블, 비용, 지표, 그리고 의도. 이 모든 것이 각자 자기 몫의 힘을 행사한다. 출시 일정은 시나리오를 자르고, 더빙 비용은 컷씬을 자르고, 보상 테이블은 캐릭터가 등장하는 위치를 결정한다. 라이터의 의도는 이 힘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동등한 하나는 아니다. 더 작은 하나일 때가 더 많다. 캐릭터가 출시되어 살아가는 모습은, 그러므로, 나의 작품이 아니라 이 모든 힘들이 만나는 자리에서 발생하는 무엇이다.

처음부터 나는 그를 혼자 살릴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매듭의 한 가닥이었을 뿐. 그렇다고 죄책감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매듭의 한 가닥이었다는 사실이 윤리적 책임을 면제해주지는 않기 때문에. 다만 책임의 모양은 달라진다.

글을 쓰기 전, 김세연 님의 「해녀, 다이버, 젊은 여자」1를 읽었다. 평생을 바다와 몸으로 부딪히며 익혀온 해녀의 앎이, 학교라는 제도 안에서 다이버의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에 대한 글이었다. 글쓴이는 그 번역이 단순한 보존이 아니라 바다와 몸과 관계 자체를 재배열하는 과정이라고 썼다. 그 글을 읽으면서 우리 일과 닮은 점이 있다고 느꼈다. 한 캐릭터의 내면에 대해 가졌던 어떤 직관, ‘이 인물은 이런 사람이고, 이 진실을 알게 되는 데는 이만큼의 시간이 걸려야 한다’는 직관이, 분량 제약과 동선 설계와 출시 일정의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이 그렇다. 번역이 끝나면 캐릭터는 여전히 거기 있다. 거기 있는데, 다른 사람이다. 완전히 다른 사람은 아니지만, 똑같은 사람도 아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잘못 생각하기 쉽다. 30장의 T가 먼저 존재했고, 그 T가 압축되어 10장의 T가 되었다는 식으로. 그건 사실이 아니다. T는 30장로 먼저 존재한 적이 없다. 그는 처음부터 회의실과 일정표, 라이터의 직관과 PD의 우려가 함께 작용한 자리에서, 오직 그 자리 안에서 자기 자신으로 출현했다. 30장의 T는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다. 그는 내 머릿속에서만 살아있는 유령이고, 그 유령에 대해서만 나는 빚을 진다. 이 빚은 그러므로 실재하는 T에 대한 빚이 아니다. 실재하지 못한 T에 대한, 그러나 내가 실재할 수 있었다고 믿었던 T에 대한 빚이다.

이상한 일이다. 한 번도 실재한 적 없는 사람에게 빚을 진다는 것이.

번역의 손실을 한탄하려는 게 아니다. 압축 없이 완성되는 시나리오는 없다. 30장을 그대로 살리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일하는 게 우리 일이다. 다만 우리가 이 일을 하면서 무엇을 자르고 있는지를, 정확히 무엇이 잘려나가는지를, 스스로에게는 정직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회의실에서는 ‘이 장면을 빼도 플롯에는 지장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건 직업적으로 옳은 말이다. 하지만 회의실 밖에서, 새벽에 혼자 모니터 앞에 앉아서, 우리는 다른 말도 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T가 무너질 시간을 갖지 못하게 했다.’

이 일을 시작하고 몇 년이 지나면서, 게임 시나리오 라이터의 윤리라는 게 있다면 그건 캐릭터에 대한 어떤 종류의 ‘기억하기’에 가깝다고 생각하게 됐다. 잘려나간 장면에 대한 기억. 살아남지 못한 분기에 대한 기억. 다른 식으로 살았어야 했지만 그렇게 살지 못한 인물에 대한 기억. 이건 부채의식이나 죄책감이 아니다. 그저 이렇게 됐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그 앎을 다음 작업에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다.

실현되지 못한 것이 곧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30장짜리 T는 실현되지 않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실재한다. 내 구글 클라우드 어딘가에, 회의실에서 했던 발언 어딘가에, 잘려나간 스토리보드 어딘가에, 그의 며칠이 접혀 있다. 실현된 T 옆에서 실현되지 못한 T가 함께 살아간다. 두 T가 서로를 굴절시키면서, 내가 그를 떠올릴 때마다 함께 호명된다.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끝나지도 않는 채로.

자르지 않아도 되는 일은 많다. 자르는 사람이 자기 한 명인 일도. 그런데 나는 이 일을 하고 있다. 잘 모르겠다,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어쩌면 자르는 일이, 자르면서 무엇이 잘려나가는지를 정확히 아는 일이,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캐릭터를 혼자 살리는 것보다 여러 사람과 함께 한 캐릭터를 ‘어느 정도까지’ 살려내는 일이 더 어렵고, 더 정직하고, 더 내 일이라고 느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NPC는 누구의 친구입니까?”

그들은 시나리오 라이터의 친구인가, 유저의 분신인가, 아니면 그저 회사의 자산인가. 정답은 셋 다이고, 어느 하나도 아니다. NPC는 우리 모두의 비대칭적 사랑의 합이다. 사랑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많은 손이 닿았고, 자산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많은 마음이 들어갔다. 그 사이 어딘가에서 T는 살아간다. 그가 무너질 시간을 갖지 못한 채로. 그를 기억하는 한 사람의 라이터를 알지 못한 채로.

그래서 다시 한 번 질문에 답한다.

“그러면 그… 캐릭터 대사 같은 거 쓰는 일이죠?”

정확히 말하자면 아니다.

대사를 쓰는 일, 자르는 일, 최종적으로 기억하는 일.

내가 하는 일은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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