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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
말씀의 집, 문화의 자리: 집에서 집으로
series
최남주
필드노트
... 인도네시아 토라자

  1. 이하 모든 인명은 가명이며, 추가로 익명성을 확보하기 위해 리(I: kelurahan, ward) 이하의 지명 역시 가명 처리한다. 

  2. 이하 원어 병기시 인도네시아어는 ‘I’로, 토라자어는 ‘T’로 표기한다. 

  3. 파파토니, 마마조니와 마찬가지로 ‘마마줄리’는 이른바 종자명호칭(teknonym)이다. 토라자에서 자녀를 둔 사람은 첫째 자녀의 이름을 딴 ‘~의 엄마’(마마~) 혹은 ‘~의 아빠’(파파~)로 불린다. 이후 그가 손주를 두면 서서히 첫째 손주의 이름을 딴 이름, ‘~의 할머니/할아버지’(네넷~)로 불리게 된다. 즉 토라자에서 자신의 고유한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자식을 두기 이전까지에 한정된다.  

  4. Roxana Waterson, Paths and Rivers (Leiden: KITLV Press, 2020), 139. 

  5. ‘한 집,’ ‘집 전체,’ ‘이웃’을 뜻하는 ‘상바누아’에 동사화 접두사 ‘맛-’(T: ma’-)이 붙어 파생한 이 말은 문자 그대로는 ‘한 집(의 행위)을 함,’ 혹은 ‘한 집이 됨’을 의미한다. 

  6. Aurora Donzelli, Methods of Desire: Language, Morality, and Affect in Neoliberal Indonesia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19), 63.  

  7. 고상집이기 때문에 테라스에 들어서려면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8. Marcel Mauss, Essai sur le don: forme et raison de l’échange dans les sociétés archaïque (Paris: Librarie Félix Alcan, 1925), 36-37. 

  9. Claude Lévi-Strauss, “Nobles Sauvages,” in Culture, science et développement: Mélanges en l’honneur de Charles Morazé (Toulouse: Privat, 1979). cf. Janet Carsten and Stephen Hugh-Jones (eds), 1995, About the House: Lévi-Strauss and Beyond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5). 

  1. 집에서 집으로

“어디 사니?”
“저기 탐벤(Tamben)에, 마마줄리1에요. 마칼레 대로에서 발리안(Balian) 방면으로 빠지는 갈랫길에…”
“아 마마줄리! 파닛(Pani’) [마을] 마마줄리지?”

토라자에서 현지조사를 막 시작했을 때, 나는 누군가의 집을 언급할 때마다 “마마줄리의 집에”(T: jo banuanna Mama Juli)2라든가, “파파토니의 집 근처”(I: dekat rumahnya Papa Toni)라며 꼬박꼬박 ‘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말하곤 했다. 머지않아 이렇게 말하는 일이 아주 드물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은 그저 “마마줄리에”(T: jo Mama Juli)라든가 “파파토니 근처”(I: dekat Papa Toni)라고 말한다. ‘마마줄리’와 ‘파파토니’가 사람의 이름일 뿐 아니라 그 자체로 집의 이름인 듯 말이다.

파닛 마을에는 이처럼 사람의 이름으로 불리는 스물 남짓의 집들이 있다. 하여 마을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행사들에 관한 대화에는 사람과 집이 착종된 이름들이 오르내린다. “오늘 파파토니에서 닭을 잡는대!”라고 하면 시투앙 산기슭 초입에 사는 파파토니 가족이 닭을 잡아 잔치를 벌인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내일 저녁에는 리마(Lima) 마을로 넘어가는 북쪽 경계 부근 “마마조니[의 집]에서” 가정예배가 있고, 또 어느날 아침에는 마을 어귀 “촌장님[의 집]에서” 집 보수 공사를 위한 품앗이가 있을 것이다.

토라자에서 나의 집은 파닛 마을 어귀로부터 발리안 갈랫길을 따라 왼쪽으로 다섯 번째 집, ‘마마줄리’였다. 이 ‘마마줄리’라는 이름 역시 사람의 이름이자 집의 이름이다. 나는 세 명의 딸과 두 명의 손주를 둔 마마줄리라는 사람의 양자(養子)로 받아들여져, 그들 가족이 거주하는 목조 고상(高床) 가옥 ‘마마줄리’에 함께 살았다. 이후 나는 마을 안팎에서 사람들이 물어오는 “어디 사니?”라는 질문에 “마마줄리에요”라고 답해가며, 사람의 이름으로 불리는 집들의 지도 속에 자리 잡아갔다. 파파토니, 마마조니, 촌장님의 이웃인 파닛 마을 마마줄리3의 사람으로서 말이다.

“어디 사니[머무니]?”(T: umba munii torro?)는 토라자에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 반드시 묻고 답하는 질문이다. 처음에 나는 이 질문에 마칼레, 탐벤 등의 지명으로 답하곤 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누구랑 사는데?” 혹은 “누구 집인데?”라고 재차 물어왔다. “어디 사니?”라는 질문으로 알고자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내가 사는 집의 이름, 즉 집을 대표하는 사람의 이름인 것이다. 결국 이 질문은 “어느 집에 사니?”라는 질문과 다름없다.

물론 상대방이 우리 집의 이름인 ‘마마줄리’를 모른다면 집의 지리적 위치를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마칼레, 탐벤과 같은 지명은 만족스러운 대답이 아니다. 상대방은 언제나 집으로 가는 구체적인 길을 알기를 원하고, 집의 생김새나 여러 면면에 대해 묻기도 한다. 이제 나는 그와 함께 이런 저런 ‘길을 보며,’ 마마줄리라는 집으로 찾아가는 상상의 여정을 떠나야 한다. 이를테면 이렇게 말이다.

“우리가 남쪽 멩켄덱(Mengkendek) [방향]으로 가면요, 아저씨,”
“어어, 마칼레 대로 말이지?”
“네 마칼레 대로요, 읍내 지나가지고, 발리안(Balian)[으로 빠지는] 갈랫길 있잖아요? 거기서 좌회전.”
“어어 좌회전.”
“네, 그 갈랫길에 있어요.”
“[길에서] 오른쪽? 왼쪽?”
“왼쪽이요. 그... 다섯 번째, 그... 아래에 정자 있는 집이요.”
“돌집? 나무집?”
“나무집이고, 고상(高床) 집이요.”
“아아, 길을 봤어[알았어].”

이때 그가 “길을 봤”다 함은 길을 알았다는 뜻인데, 단순한 관용어법이 아니다. 우리는 이 말로 하는 여정에서 정말로 함께 길을 보기 때문이다. 적어도 마마줄리로 가는 길이 그의 머릿속에서 선명히 보일 때까지 우리의 여정은 끝나지 않는다. 끝내 상대가 그 “길을 봤”다면 이제 그는 나라는 사람을 알아갈 준비가 된 것이다. 아니, 우리의 집 마마줄리로 찾아갈 준비가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도 상대를 ‘알려면’ 그의 집으로 가는 길을 ‘보아야’ 하고, 집으로 찾아갈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나는 서로 어디 사냐 묻고 답하며 토라자의 사람들과 알아갔다. 동시에 사람의 이름을 집의 이름으로 알고, 반대로 집의 물리적이고 지리적인 존재를 사람의 얼굴처럼 기억하는 법을 배웠다. 이는 곧 산과 강, 논과 밭으로 수놓인 토라자 고산지역의 지리를 집에서 집으로 이어지는 지도로 상상하고, 또 그 지도 속에서 사람들과 관계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었다.

워터슨4이 이야기했던 이 “지도,” 즉 집과 사람의 삶이 얽힌 지리적이면서 사회적인 지도에서 사람의 관계는 곧 집의 관계이다. 그러니 누군가를 제대로 안다는 것은 그의 집을, 또 집으로 가는 길을 아는 것이다. 서로의 집이 물리적으로 가까운 이웃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다. 이웃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는 토라자어 ‘상바누아’(T: sangbanua)의 기본 의미는 ‘한 집’ 혹은 ‘(한) 집 전체’이다. 이웃이란 서로를 ‘한 집’으로 알아가며 각자가 ‘집 전체’로서 교류하는 관계인 셈이다.

따라서 이웃끼리는 서로의 집을 알고 또 집으로 가는 길을 알아서 (혹은 ‘길을 보아서’) 집으로 찾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앞서도 보았듯 이것은 이웃 관계뿐 아니라 모든 인격적 관계의 전제이다. 집에서 집으로 찾아가는 교제, 즉 ‘맛상바누아’(T: massangbanua)5는 사람과 사람이 ‘한 집’(상바누아)과 ‘한 집’으로 관계하는 집들의 사회에서 가장 기본적인 교제 형태이기 때문이다. ‘맛상바누아’의 중의적 의미(‘한 집으로 찾아감,’ ‘한 집이 됨’)가 시사하듯, 이것은 서로의 ‘한 집’을 방문하는 교제이자 방문자와 응대자가 ‘한 집’이 되어 어울리는 교제이다.

돈첼리6가 “구멍 숭숭 뚫린 집”이라고 표현했던 토라자의 집은 언제든 이러한 교제에 임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날이 어둡기 전에는 항상 열려 있는 문간, 집벽 곳곳에 난 창과 틈새는 아무리 예고없이 찾아온 손님의 인기척도 놓치지 않고 집안에 들인다. 집안 사람들 역시 이 인기척을 금새 낚아채어 응대에 나설 준비가 되어 있다. 파닛 마을 마마줄리의 집도 그렇다. 자동차나 오토바이의 경적 소리, “안녕하세요!”라고 외치며 걸어오는 말소리가 들리면 우리 ‘마마줄리’의 사람들은 ‘한 집’으로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누군가 테라스 난간 너머로 고개를 내밀어 누가 또 몇 명이 왔는지 확인하고, 큰 소리로 집 전체에 알린다. 그러면 누군가는 부엌으로 달려가 다과를 준비하고, 또 누군가는 테라스나 거실에 손님과 함께 앉을 자리를 마련한다. 이윽고 손님이 테라스에 오르면7, 문간을 지키던 누군가는 손님을 맞으며 이렇게 말한다. “앉으세요!”(T: unnoko’komi!) 손님이 자리에 앉으면 우리도 손님과 함께 앉아 부엌에서 내온 빵과 과자, 커피나 차를 먹고 마시며 서로의 집안 소식을 나눈다.

이것은 토라자의 어떤 사회적 교제에서든 빠지지 않는 ‘잔치’(T: pa’maruasan)의 작은 표본이다. 때로 이 잔치는 다과에 그치지 않고 공동식사로 이어져, 서로 다른 집의 사람들이 모인 이 자리는 점차 한 집에서 먹고 마시는 공동체의 모습을 갖춘다. 오늘만큼은 이 집과 저 집의 사람들이 “한식구”(T: to sikurin; ‘한솥밥 먹는 사람’)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한식구로서 먹고 마시는 시간이 흘러 밤이 이슥하면, 우리는 손님에게 권한다. “[오늘 밤] 이 집에 머무세요!”(T: Torro bangkomi inde banua!) 그들이 거절하지 않는다면, 손님용 방 침대나 거실 돗자리에 몸을 누이고 오늘밤 우리 집에 ‘머물게’ 된다.

후일 우리가 그들의 집을 방문하더라도 마찬가지의 일이 벌어질 테다. 그들도 그들의 집을 함께 먹고 마실 자리로, 나아가 몸을 누여 밤을 보낼 자리로 내어주며 환대를 돌려줄 것이다. 우리는 집에서 집으로, 찾아가고 찾아오며 가깝고 친(親)한 ‘한 집’이 되어간다. 이렇듯 집에서 집으로 오고가는 관계란, 서로의 집을 알 뿐 아니라 두 집이 어느 한쪽 집을 자리 삼아 ‘한 집’이 되는 관계이다. 주인집 사람이 손님에게 으레 건네는 말, “당신 집처럼 여기세요!”는 그저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다. 정말로 서로가 서로의 집에서 함께 먹고 마시고 또 잠을 자는 ‘한 집’ 식구가 되는 것. 이것이 토라자식 환대의 논리이다.

여기에는 집과 집 사이를 오가는 환대의 ‘증여’가 있다. 모스식 증여는 흔히 쿨라에서처럼 목걸이나 팔찌 같은 현물(現物)을 주고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증여론』에서 모스는 분명 어떤 예의의 교환 역시 염두에 두었다. “그들이 교환하는 것은 재화와 부, 동산과 부동산, 경제적으로 유용한 사물만이 아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예의와 잔치, 의례, 군사적 원조, 여성, 아이, 춤, 축제(…)를 교환한다.”8 쿨라와 함께 모스가 증여의 대표적인 사례로 제시하는 포틀래치는 기본적으로 음식과 잔치, 축제를 베풀어 좌중을 환대하는 자리이다.

마찬가지로 토라자의 집은 찾아온 손님에게 환대의 “예의”를 베푸는 자리가 된다. 이 예의는 “경제적으로 유용한 사물”은 아닐지언정 그렇다고 비물질적인 것도 아니다. 토라자식 환대는 무엇보다도 집이라는 지극히 물질적인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다. 이는 ‘거주’ 자체를 내어주는 것이기도 하다. 토라자에서 거주를 뜻하는 ‘토로’(T: torro)는 어딘가 잠시 ‘머무는’ 일부터 집에 정주하는 일까지 포괄한다. 그리고 이 거주는 앉기, 즉 ‘운노코’(T: unnoko’), ‘통콘’(T: tongkon)과 동일한 행위이다. 운노코의 어근 ‘오콧’(T: oko’)에서 파생하는 ‘카오코란’(T: kaokoran)이 ‘자리’이자 ‘거처’이고, 조상의 집 ‘통코난’의 축자적 의미가 ‘통콘’의 장소, 즉 ‘앉는 장소’인 것은 이 때문이다. 적어도 환대는 ‘앉기’와 ‘거주’가 마치 동일한 것처럼 ‘앉으라고,’ 또 ‘머물라고[거주하라고]’ 권하며 자기 집을 거주의 자리로 건네는 것이다. 함께 먹고 마시고, 휴식을 취하고, 잠을 자는 자리로서 말이다. 결국 환대의 교제란 집을 매개로 방문자와 응대자가 자리=거처를 주고 받는 교제이다.

앞서 묘사한 것은 가볍게 불쑥불쑥 이루어지는 일상적인 교제의 장면이지만, 때로 집들의 교제는 더욱 무거운 의미를 띈다. 집에 함께 앉아 먹고 마시는 교제는 혼담이 오가고, 혼약을 맺고, 성사된 혼인을 기념하는 자리가 될 수 있다. 또 집은 죽은 자를 애도하는 교제의 자리이다. 특히 죽은 자의 집을 찾아가는 것은 집과 집 사이 예의 중에서도 가장 높은 등급에 해당한다. 상을 치르는 집은 사자의 집에 즉각적으로 방문하는 ‘마카두두’(T: makadudu)를 위시한 일련의 문상(問喪), 즉 ‘맛통콘’(T: ma’tongkon)의 장소가 된다.

의미의 무게는 예의의 무게를, 또 증여의 무게를 동반한다. 혼례를 치르는 당사자 양측은 서로의 집에 방문하며 예물을 증여하고, 조문객과 하객은 그의 ‘집’의 이름으로 일정 수의 돼지나 물소를 증여한다. 반대로 많은 손님을 맞이해야 하는 잔칫집 사람들 역시 어느 때보다 융숭한 잔치를 베풀고 성대한 의례를 거행해야 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일반적인 집이 감당할 규모를 넘어선다. 잔치를 벌이는 집은 집 건물 자체를 넘어 문자 그대로 커진다. 앞마당에 차양을 치고, 가건물을 세우고, 간이의자를 늘어놓아 많은 사람이 앉을 자리를 마련하여 말이다.

특히 잔치를 맞은 통코난은 일반적인 집보다도 훨씬 ‘커야’ 한다. 해당 통코난에 소속된 모든 친족 구성원은 물론이고 이들을 찾아온 수많은 손님, 뿐만 아니라 그들이 날라온 물소와 돼지가 들어설 수 있을 만큼 커야 한다. 따라서 통코난은 건립 단계부터 여러 앉을 자리를 거느린 너른 앞마당을 갖춰야 한다. 통코난이 ‘앉는 장소’를 의미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통코난은 커다란 ‘자리’이고, 문자 그대로 ‘큰집’이다.

이렇듯 토라자에서 모든 사회적 교제는 그 규모와 상관없이 거주의 자리이자 환대의 자리인 집에서, 또 집을 매개로 이루어진다. 토라자 사회는 집이 거주의 장소일 뿐 아니라 특권적인 사회적 장소이자 매체가 되는 사회라는 점에서 오롯한 ‘집 사회’(société à maison)이다.9 이 집 사회에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서로의 집으로 찾아가는 길들로 이어진다. 죽은 자를 애도하거나 집안의 경사(慶事)를 축하하기 위해, 혹은 그저 친애하는 이들과 함께 앉아 먹고 마시기 위해 나아가는 길들로 말이다.

그런데 같은 길들이 누군가에게는 유독 애틋하고 그리운 길이다. 그 길은 그와 그의 가족이, 또 부모와 조상이 살아온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 그리운 길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집단이 가족이고, 친족이다. 이제 이들 가족과 친족에 대해, 그들이 ‘집’을 함께하는 삶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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